[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을 보고 - 민족과 언어

2020. 11. 9. 01:50북미 이야기/작은 역사 이야기

영화에 대한 단상

이 영화는 예전에 다큐멘터리로 본 적이 있던 이야기였다. 단지 전쟁 고아들을 중심으로 조금 더 심층 조사를 하고, 한 국가가 아닌 동유럽 전체를 상대로 전문가들의 견해까지 면담 형식으로 자료를 모은 것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그 분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무나 내용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제목 역시 굳이 "김일성의 아이들"이라고 했어야만 하는지도 불만이었다. 충분히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지만 그 아이들은 전쟁을 통한 우리 역사의 아픔 속에서 생겨난 이야기들이고 그들의 삶이 특정한 정치인에게 소속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불편했다.

기념비 - 1952년부터 1959년까지 조선 전쟁 고아들인 우리들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파란 인민들의 육친적인 배려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 1959년 7월 30일 국립 중앙 제 2학원 조선 전쟁 고아 일동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서 한번씩은 음미되어야 할 주요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이후에 생겨난 수많은 고아들이 남한에서는 입양의 형식으로, 북한에서는 (소련의 중재를 통한) 동유럽으로의 위탁 교육 형식으로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흘러들어간 사건은 우리가 학창 시절에는 들어보지도 못하고 교과서에 한 줄도 실리지 않았던 이야기들이다.

 

미르초유 할머니와 남편 조정호의 인연

내가 감탄을 한 내용 중 하나는 남편 조정호와 헤어진 후 루마니아에서 혼자 남편을 기다리며 한국어 - 루마니어 사전을 30년간 만들어 온 미르초유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50이 넘으며 사랑과 같은 단어에 어색함과 순수성을 의심하는 성향으로 바뀌어가는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토론토에서 [고려인 - 한 민족]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

2017년 이곳에서 7년 가량 근부하던 통신 회사를 나와서 잠깐 작은 금융 관련 회사에서 반년 가령 일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하던 프로젝트에 어느 동양인 외모의 젊은 여성이 계약직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전혀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매우 특이한 기억이라 2달 남짓 같이 일했던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데, 영어 억양을 들었을 때 동유럽이나 러시아 어를 모국어로 하는 여자였다.

프로젝트 총 인원이 5명 정도 밖에 되지 않던 작은 규모라 자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고, 점심 시간에 근처에 있던 로렌스 마켓 시장에 갈 때도 나에게 같이 가자고 먼저 제안을 하는 활발한 성격이었다. 같이 일을 시작하고 며칠 되지 않아서 내가 어느 출신이냐고 물었는데, 돌아온 답이 'I am a Corea(고려인)' 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할 수 없는 고려인이라... 내가 조금 당황했다. 

당시 내가 일하던 작은 회사는 호감 있는 젊은 백인 여성들이 적지 않았는데, (내가 굳이, 어색하게 생각하는 이런 여성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중 하나는 이 고려인 여자 분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오히려 구 소련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 고려인 여자가 백인 여성들보다도 피부도 가장 하얗고, 회사의 수십명 젊은 여성들 중에서도 군계일학같이 매력적으로 보였었다. 당연히 그 여자가 사무실을 지나갈 때는 많은 백인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 여자는 (파키스탄 출신의 머리가 스님같이 하나도 없는) 젊은 남자와 같이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남편이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짧게 하며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쪽은 모두가 할아버지/할머니 때 스탈린에 의하여 카차흐스탄 쪽으로 이주 온 집안이었고, 부모님까지는 한국어를 집에서 사용을 하고 살았다고 한다.

 

민족과 언어

그 프로젝트에서 먼저 나오고 다른 직장으로 옮기던 중이라 그 분에 대한 기억은 바빠서 완전히 잊혀졌지만, 이후에 동유럽과 구소련에 퍼져 있던 한민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고려인 여자가 생각이 났다. 민족이란 무엇일까, 언어는 민족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

나는 한국어에 대한 불필요한 우월감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영어에 대해서도 열등감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얼마전 '나의 아저씨' 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의 모국어 구사자라는 사실에 감사해 했다. 그 감사함이라는 것은 한국어에 들어있는 정서적인 감성과 수많은 사람들의 갈등과 치유 속에 흘러온 역사적 체험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영어와 한국어 모두의 원어민으로 태어날 수는 없다. 초등학교부터 북미에서 시작한 딸은 대학에 진학하며 철학을 전공하며 영어가 모국어 이상의 수준이 되면서 한국어에 대한 감각을 거의 상실했고, 한국어와 영어를 가장 자유스럽게 구사하는 아들 역시 이중 언어 구사자일 뿐이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두 언어 모두에 대해서 원어민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았다.

굳이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해야만 그 민족의 일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민족적 문화의 공감대가 있어도) 몇 세대를 지나면서 언어를 완전히 상실하면, 그때는 그들이 더 이상 같은 민족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 고려인 여자 분을 생각할 때마다 할아버지 시절, 고난했던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 속에서 정체성의 가치를 지켜온 그 분들의 고향에 대한 애정이 손녀 딸에게 흘러왔고, 후손들의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세대도 세월이 지나 갈수록 그들은 그 원심력을 벗어나 자신들이 결정하는 또다른 미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찌보면 그것은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자연의 섭리인 듯 싶다.

[]

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36392.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