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무거운 역사 (7) - 게티스버그 전투 전까지

2020. 10. 11. 22:29북미 이야기/작은 역사 이야기

노예해방선언 (Emancipation Proclamation)

남북 전쟁 직전까지 흑인 노예제도에 대한 링컨 대통령의 입장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즉 노예 해방을 '지금 당장' 무조건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노예제도는 서서히 개혁을 하면서 더 이상의 노예 제도를 확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부 연맹의 독립을 하려는 움직임은 노예 제도와는 상관없이 미 합중국에 대한 반역(Rebel)이며 한 치도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당시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미국의 내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선언에 대한 압박을 대 내외적으로 받고 있었다. 남부의 경제는 매우 힘들었지만 단합되고 있었고, 북부의 경제는 호황이었지만 매우 분열되고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노예 해방선언은 '북부 측이 전혀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해석하게 된 남부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되었다.하지만 유럽 국가들로 부터는 북부 미 합중국이 남부 연맹보다 보다 도덕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하면서 유럽 국가들의 직/간접적인 내전 간섭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다.

당시의 저명한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디어 밀(John Stuart Mill) 은 노예 해방선언 소식을 접하고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 남부 연맹의 승전/개선은 사악한 힘의 승리가 될 것이다. 그 사악한 힘이라는 것은, 전 세계에 있는, 전진하고 있는 적들에게 힘을 주고 우리의 친구들에게는 좌절(damp)을 주는. 것이다. 미국 남북 전쟁은 인류 사건에 있어서 옳고 사악한 것에 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The triumph of the Confederacy would be a victory of the powers of evil which would give courage to the enemies of progress and damp the spirits of friends, all over the civilized world. The American civil war is destined to be a turning point for good or evil of the course of human affairs.)"

 

첸슬러빌(Chancellorsville) 전투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남북 전쟁은 대략 1만 회 이상의 교전이 있었던 큰 전쟁이었고, 전투 상황은 노예해방선언 이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당시의 인구나 경제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규모가 컸던 북부 연합과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남부 연맹의 전략적인 목적은 다소 상이한 편이었다. 즉 남부 연맹을 합법적인 국가 조직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링컨 행정부는 모든 반역 세력에 대한 섬멸을 목표로 하였고, 상대적인 열세를 가진 남부 연맹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전투에서 전략적인 승리를 잡으며 완전한 독립을 북부로부터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부 전역에서 발생한 전투는 (1) 북부군이 남부군의 수도인 리취몬드를 함락하기 위한 공세와 (2) 남부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방어적 전투 또는 북부의 수도인 워싱턴을 공격하여 전략적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공세적인 전투의 두 가지 양상으로 흘러갔다. 리 장군의 뛰어난 승리로 기록된 이 첸슬러빌 전투는 이전에 있었던 Fredericksburg 방어를 포함하여 남부의 수도 리취몬드(Richmond)를 탈환하기 위한 북부의 공격에 따른 남부군의 방어적인 전투였다.

 이 전투는 북부 연합은 후커 장군(Hooker)이 남부 연맹은 리(Lee) 장군 지휘 아래 시작되었는데 리 장군의 과감한 부대 분리 운용으로 북부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리 장군은 적의 공격에 맞이하여 무려 3번이나 부대를 분리해야 하는 결심을 하였으며, 이 전투는 리 장군의 가장 큰 승리(Brilliant victory)로 기록되었다.

(15만명의 군인들이 싸워서 북부는 17,000 명, 남부 13,000 명의 사상자를 내며) 남부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 결과를 보고 받은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 하나님. 이제 국민들은 뭐라고 말할 것인가"(My God, My God, What will the country say"라며 한탄을 하였다. 

하지만 승리한 남부 연맹 입장에서도 무엇보다 가장 큰 손실은 (불런 전투에서부터 유명해진 남부 연맹의) 철벽 잭슨("Stonewall" Jackson)장군의 죽음이었다. (아군의 오발로 왼쪽 팔에 총을 맞고 심한 부상을 당한) 잭슨 장군의 소식을 들은 리 장군은 "그(잭슨 장군)는 왼팔을 잃었지만 나는 오른쪽을 잃었다 (He has lost his left arm, but I have lost my right.)"라며 안타까워 했다. 실제로 잭슨 장군의 부재는 곧 이어 진행된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회의 (링 장군과 잭슨 장군) Library of Congress

 

잭슨 장군은 매우 뛰어난 군인이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았던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는 전쟁의 부상으로 8일 후 숨을 거두었는데, 아내의 품 안에서 죽어가며, 깨끗한 의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며 의사가 제안한 몰핀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직전 모두가 선명히 들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이제) 같이 강을 건너서, 나무들의 그늘 아래에서 쉬자 (Let us cross over the river and rest under the shade of the trees)"

 

게티스버그(Gettysburg) 전투의 시작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게티스버그 전투는 남북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자 남북 전쟁에서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교전이었다. 또한 이 전투 4개월 후 직접 이 지역을 방문한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는 중남부의 그랜트(Grant) 장군이 공격하고 있던 빅스버그(Vicksburg) 전투와 많은 관계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서부 전역에서의 북부연합군은 샤일로(Shiloh) 전투 이후 계속해서 남쪽으로 공격을 이어갔고, 그랜트 장군은 미시시피 강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인 빅스버그(Vicksburg) 지역을 미 해군과 같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만약 이 지역이 북부군에 의하여 점령된다면 남부군은 완전히 동서로 분리 되고 더욱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빅스버그 지역 - http://storymaps.esri.com

이를 우려한 남부 연맹의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대통령은 리 장군과 - 공격받고 있는 빅스버그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지원군을 보내야할 지에 대한 - 의논을 하였다. 하지만 리 장군은 군대를 서부 전선 멀리까지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워싱턴 방향의 북부 지역을 공격함으로서 전세를 만회하자고 주장을 하였고 이에 데이비스 대통령은 동의를 하였다. 이제 남부연맹의 리 장군은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북부 연합의 수도가 있는 워싱턴 지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1863년 6월 말 미국 남북 전쟁은, 동부 전선에서는 게티스버그로, 서부 전선에서는 빅스버그에서의 대규모 전투를 두고 양 측은 결전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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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battlefields.org/learn/galleries/chancellorsv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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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maps.esri.com/stories/civil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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