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무거운 역사 (10) - 마지막 전투와 항복

2020. 11. 1. 06:44북미 이야기/작은 역사 이야기

피터버그(Peterburg) 전투

피터버그 전투는 남북 전쟁 중 양측의 가장 중요한 장군이었던  북부의 Grant 와 남부 Lee 장군이 직접 지휘관으로서 맞붙은 싸움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의 전투는 1864년 6월에서 1865년 4월까지 수 차례 걸쳐서 일어났다. 남부군은 비록 1963년 7월 게티스버그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하였지만 어떻게 해서든 제한적인 승리를 통해서 유리한 휴전 협정을 만들고 싶어했으며, 북부군은 게티스버그 이후 남북 전쟁을 완전히 마무리하고자 총 공격을 위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피터버그 전투 지역

링컨 대통령은 서부 전역에서의 빅스버그 함락을 성공한 그랜트 장군을 북부군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부 전선의 지휘를 맡은 그랜트 장군은 자기를 대신하여 서부 지역은 셔먼 (William Tecumseh Sherman) 장군에게 위임하였다. 이 두 장군의 임명은 전쟁의 양상을 많이 바꾸었다. 이들은 기존의 군인들만의 전쟁 양상에서, 남부군의 전쟁 수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민간 시설에 대한 전면적이고 공세적인 "총력전(total war)"으로 나아갔다.

링컨 대통령의 인준 아래 그랜트 장군은 1864년 5월부터 버지니아에 있는 리 장군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하여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가능한 모든 전투 지역에 전투 병력을 투입하였다. 한 예로 Cold Harbor 지역 전투에서는 단 한 시간 안에 그랜트 장군의 7천 명의 병사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종전 직전, 피터버그에서 전사한 소년 병사

그리고 5월 4일부터 7월 18일까지의 전투에서 리 장군은 32,000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반면, 그랜트 장군은 대략 60,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거의 두 배 가까운 희생을 통해 승리를 얻은 북부군의 입장에서 단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었다. 즉 남부군에서는 그 희생자의 수는 회복이 불가능한 피해이지만, 그랜트 장군 입장에서는 다시 충원이 가능한 병력 자원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값비싼 희생에 대해 북부 연합의 민주당 정치인들과 신문은 그랜트 장군을 "도살자(butcher)" 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였다.

1864년 대통령 선거

지금에서야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링컨의 재선이 당연한 사실로 여겨지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링컨의 재선은 매우 암울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4년 째 지속되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 높은 사상자 비율, 최근의 북부군의 패배 등의 이유로, 적지 않은 수의 남부에 우호적인 정치가들은 조속한 시일 내에 남부와 휴전 협상을 하고 싶어하였다. 그들은 전쟁 사령관 출신이며 (전쟁 중에도 링컨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맥켈런(George McClellan)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으며, 맥켈렌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설상가상으로 링컨의 정당이었던 공화당 내에서도 보다 과격한 개혁을 주장하며 링컨과 의견이 다른 이들은 제 3의 당을 만들며 프레몽(John C. Fremont)을 또 다른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링컨 본인도 몇 번이고 "나는 패배할 것 이다 (I am going to be beaten)" 이라는 말을 하며 그의 재선이 힘들 것이라는 것을 실토했다.

이러한 가운데 서부 지역으로부터 남부 연합을 공격하며 대서양 지역으로 들어오던 셔먼 장군의 부대가 9월 2일 "아틀란트는 우리 것이다(Atlana is ours)" 라는 승전보를 보내오면서 선거 양상은 링컨에게 유리하게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0월 19일 쉐리던(Philip Sheridan) 장군이 버지니아의 북부 지역의 쉐난도아(Shenandoah Valley)계곡 지역에서 남부군을 완전하게 제압하면서, 이 승리는 북부의 유권자들에게 링컨 행정부에 대한 지지를 보내게 되었고, 링컨은 재임에 성공하였다.

 

아포마톡스 (Appomattox) 항복

1865년 늦은 3월, 남부 연맹의 패배는 뚜렷해 보였다. 그랜트와 쉐리던 장군은 서쪽으로부터 남부연맹의 수도인 리치몬드를 공격해오고 있었고, 셔먼 장군은 남쪽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남부의 데이비스 대통령은 수도를 버리고 피신해 있는 가운데, 항복을 결심한 그랜트 장군은 4월 9일 버지니아의 아포마톡스(Appomattox Court House) 에서 리 장군을 만났다.

링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휴전조건은 남부군에 대하여 관대하게 주어졌다. 남부군인들은 그들의 소지품과 말, 그리고 삼일치의 식량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약속을 하였으며, 장교들은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다. 그로부터 2개월 내에 모든 남부군은 몰락하였다. 이로써 4년 가까이 끌어왔던 남북 전쟁은 막대한 피해와 미국 사회의 불가역적인 많은 변화를 가져오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포마톡스에서의 항복(Surrender at Appomattox), Thomas Lov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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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battlefields.org/learn/articles/petersburg-wearing-down-lees-army

[] Peterburg

www.battlefields.org/learn/articles/petersburg

[] 10 facts about Peterburg

www.battlefields.org/learn/articles/10-facts-petersburg-campa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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