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무거운 역사 (11) - 남북전쟁의 종결

2020. 11. 9. 10:44북미 이야기/작은 역사 이야기

링컨 대통령 암살

1864년 말 미 대통령 재선에 승리하고, 1865년 4월 9일 아포마톡스(Appomattox)에서의 항복 문서의 서명이 리 장군과 그랜트 장군 사이에서 작성되었다. 그리고 5일 후인 4월 14일 종전을 축하하며 관람한 'Our American cousin' 이라는 연극을 보기 위한 극장 Ford 에서 남부군의 스파이였으며 연극 배우였던 부스(John Wilkes Booth)에 의하여 암살 당한다. 머리에 치명적인 총격상을 받은 링컨 대통령은 다음 날 4월 15일 오전 7시 22분 경 사망하였다.

죽고난 링컨 대통령의 주머니 안에 안경 2쌍, 주머니 칼, 손수건, 지갑이 있었고.. 지갑 안에는 9개의 뉴스 스크랩과 남부 연맹 5달러 지폐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특히 남부 연맹에서 발행한 5달러 지폐를 가지고 다닌 링컨 대통령의 의도가 궁금했다.

링컨 대통령의 암살

 

4년의 기나긴 내전의 종전과 거의 동시에 미국 대통령 역사상 최초로 암살된 이 사건은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특히 4월 11일 흑인들의 선거권에 당위성을 연설을 하고 노예해방을 선언했던 바로 그 대통령의 사망으로 수많은 흑인들은 슬픔과 (다시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공포를 동시에 느끼고, 며칠 간 백악관 앞에서는 수 백명의 흑인 여성과 아동들이 울면서 슬퍼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가장 저명하였던 흑인 지도자 프레데릭 더글라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당신들 백인들은 아브라함 링컨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잘해봐야 입양한 자녀들에 불과하다. 진정한 (노예) 폐지론자의 근거 입장에서 바라볼 때, 링컨 대통령은 느리며, 차갑고, 둔하며 무관심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국가의 정서로서 그를 판단하면, 정서적으로 그는 정치인으로서 모욕적으로 얽매여 있었다. 그는 신속했으며, 열정적이고 급진적이었으며 이 모든 것을 다하도록 결심하였었다. 그 앞에 주어진 엄청난 규모의 (역사적) 사명의 규모를 측정하고 .. 끝내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고려하면서 ... 무한한 지혜(의 신은) 아브라함 링컨보다 자신의 사명에 더 적합한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You white people are the children of Abraham Lincoln. We are at best only his stepchildren. Viewed from the genuine abolition ground, Mr. Lincoln seemed tardy, cold, dull, indifferent. But measuring him by the sentiment of his country, A sentiment he was bound as a statesman to onsult. He was swift, zealous, radical and determined taking him all in all. Measuring the tremedous magnitude of the work before him. Considering the necessary means to ends. Infinite wisdom has seldom sent any man into the world better fitted for his mission than Abraham Lincoln. _ Frederick Douglas)

아마도 고인이 된 링컨 대통령에게 헌정할 수 있는 극찬의 헌사일 것이다. 더글라스의 말 처럼, 집권 당시 그는 진보와 보수 양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것 같다. 노예 해방론자 들로부터는 느리고, 무관심하다고 비난받았으며, 그 반대 편으로부터는 급진적이라고 공격 받았다. 또한 그가 결심해야 하는 전쟁의 소용돌이는 수 많은 젊은이들과 미국 전역의 사람들을 다 같이 고통의 터널로 들어가게 하였다.

남북 전쟁은 수많은 이유와 원인들로 점철되었지만 결국 링컨이라는 역사적 거인의 발자취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의 대통령 당선으로 시작된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요구한 수많은 전투들로 점철되었다. 그는 남북이 전쟁으로 나아간 운명에 대해서 "내 손을 벗어났다"고 한탄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전쟁 수행에 대해서 철저하게 승리를 위하여 장군들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개인 인권 침해 여지에 대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전시 상황에서의 체포령에 대한 인준에 서명을 하였다.

그리고 수 십만의 죽음 위에서 다시 미국 사회를 다시금 세우려고 하였다. 그는 거대한 "아메리카 합중국"이라는 공화국이자.. 어떤 면에서는 거대한 "제국"의 뿌리를 봉인한 자가 되었다. 암살자는 링컨의 생물학적 생명은 끊었지만, 역설적이게 역사적 생명을 영원하도록 만들었다.

링컨을 이해하기 위해 관심있는 분들에게 2012년 링컨 이라는 영화를 추천한다. 책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역사적 인물에 대하여 특히 암살 당하기 직전의 모습에서 그가 때로는 무섭게 참모들을 다그치면서도 고민하고, 매우 뛰어난 유모감각을 가지고 있는 면들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아래 링크는 영화 감상)

psean21c.tistory.com/127

 

[감상]영화-링컨(Lincoln,2012)

.. 영화를 보게 된 계기 개인적으로는 영화 이야기는 잘 하는 편이 아니다. 보통 2시간 정도의 이야기를 영상을 통해서 볼 때마다 내가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더 많고,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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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의 사회

통계에 의하면 전쟁에 참여한 350만명 중 620,000 명 사망하였으며 남부에서는 성인 중 1/4이 사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미시시피 주에서는 전쟁이 종료된 다음 해인 1866년, 주 전체 총 예산의 1/5 이 인공 팔/다리 보조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대한 민국의 7-8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 역시 어릴 때 간혹 기차를 타면 6.25 전쟁으로 상의 군인이 된 의족/의수를 단 성인 아저씨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열차 안에서 음료수와 다과를 팔면서 다니던 광경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역사적 가정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지만,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현재의 미국의 모습은 상이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미합중국과 미연합이라는 상이한 모습의 두 국가들로 존재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반 세기 후에 시작한 1차 대전과 20세기에 미국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도 세계 질서의 중심국으로의 현재 모습도 전혀 달랐을 것이다.

 

미국 이라는 단어의 인칭 변화 (3인칭 복수에서 단수로..)

번스 (Ken Burns)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11시간 분량의 남북 전쟁(The Civil War) 에서 다큐멘터리 작가인 푸트(Shelby Foote) 는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남북 전쟁 이전과 이후에 "미국"을 지칭하는 인칭에 대한 문법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문법적으로 전쟁 전에는 The United States are 였는데, 전쟁 이후부터는 The United States is 로 "The United States" 가 하나의 단일체로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은 사실부터 전쟁 중 최초의 개인 소득세를 징수하기 시작한 것 같이 경제적 사회적인 변화도 컸으며, 특히 무기체계의 변화에 따라 수많은 전투마다 막대한 인명 피해가 따라왔다. 아마도 유럽의 군사 전문가들이 미국 남북 전쟁에서의 커다란 변화를 조금 더 정밀하게 분석하고 평가를 하였다면 1차 대전 때 발생한 수많은 진지전의 양상을 조금은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