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종교

2019. 10. 5. 23:31버트란트-러셀-Bertrand-Russell

 

러셀 개인의 종교적 체험

러셀의 어린 시절 종교적인 체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어린 시절 성장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자서전에 기술한 러셀의 성장 과정은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할아버지는 1840년에서 60년 사이에 몇 번에 거쳐 빅토리아 여왕의 수상을 지낸 귀족 집안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그가 만 4세가 되던 해에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러셀이 1872년 출생한 것을 고려할 때 어머니는 1874년 아버지는 1876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국 수상이었던 할아버지 역시 1878년 돌아가시면서 그의 집안은 온전히 할머니의 관리 아래에서 유지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귀족적인 집안 분위기대로 개인 교습에 의한 학습이 이루어졌고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외로웠다. 

그는 심지어 자살까지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로 외롭고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단지 수학에 대한 열정 하나가 그의 자살 충동을 막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15세에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존 스튜디어 밀의 자서전을 읽고 [자유의지]로 부터 시작한 회의에서 그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가 기독교적인 교리와 반대의 길을 가게 된 것은 논리적인 수학 훈련과 존 스튜어트 밀로부터의 영향이 큰 두 가지 원인이었다고 고려되는데, 특히 이 두 가지는 -(1)수학 자체과 (2)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  러셀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상과 사상가이다.

Wyatt:경께서는 이전까지 종교적인 충동(impulse)을 가지신 적이 있으십니까?

Russell:아.물론입니다. 사춘기(adolescense) 시절에 저는 깊이 종교적이었습니다. 저는 아마 수학을 제외하고 그 어떠한 것보다도 종교에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그리고 종교에 대한 관심은 저를 믿을만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문들을 깊이 바라보게 하였습니다.저는 세 가지의 문제들을 정하였는데 그것들은 저로 하여금 신과 불멸성과 자유의지가 가장 핵심적인 문제들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들을 반대의 순서로 하나 하나씩 검토하였습니다. 자유의지로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저는 믿을만한 이유를 가진 어떠한 것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다가갔습니다.저는 앞으로 대단히 회의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Wyatt:어떻게 당신은 이러한 세가지 중 어떠한 것도 믿을만한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확신하게 되셨습니까?
Russell:자유의지로 말하면 - 제 생각에 논제들(arguments)는 유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 저는 아직도 이것이 여전히 결론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저는 (그 당시) 생각하기로 모든 사물의 운동들은 역학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므로, 한사람이 말할 때 그 사람의 입술의 운동은 결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저는 그가 무엇을 말하여야 할 지 통제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것이 유효한 논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 당시 저를 확신시켰습니다. 불멸성에 대해서는, 몸과 마음의 관계는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보편적으로 예상되던 것보다 친밀(intimate)하며 뇌가 부폐하였을 때 정신은 지속(persist)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그리고 신에 대해서는, 신의 실존을 옹호하기 위한 대단히 많은 논제들의 발전이 있었는데 저는 (그 당시) 생각하였고 또한 지금도 생각하기로, 어떠한 것도 그 논제들이 유효하지 않으며, 만약 결론을 믿고 싶지만 않다면 어떠한 사람도 그러한 논제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Wyatt:저는 '역학의 법칙이 자유의지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구축하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Russell:음, 제가 그것은 제가 유년기에 생각하였던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여야만 할 것 같군요. 그것은 역학의 법칙에 근거하여 모든 사물의 운동들은 태초의 정면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성운(primitive nebula right onward)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결정적이며 이러한 것들은 어떠한 발언(speaking)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역학의 법칙은 태초의 은하계(primitive nebula)의 시기부터 A라는 사람이 매번 주어지는 경우마다 말하는 무엇이건간에 결정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A 라는 사람은 그가 무엇을 말할 지에 대해 어떠한 자유의지도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종교의 역사적 영향 

아래 대화에서 러셀은 무신론자의 주장과는 조금 차이가 나게, '신이 없다'라고 단언 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는 신이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유일신의 주장과는 다르게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과 타 종교에서 주장하는 다른 신들에 대한 위치가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러셀은 전반적으로는 종교는 인류에게 해악하였다고 주장하고, 가장 큰 이유는 종교, 특히 기독교가 다른 생각에 대한 불관용의 결과로 너무나 끔직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고 역사적 사실들을 언급한다.

Wyatt:당신은 신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단지 그러한 것들은 증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Russell:저는 그러한 것들이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올림푸스의 신들과 노르웨이의 신들이 정말로 똑같은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또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올림푸스의 신들과 Vahalla의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의 신은 그들이 가지는 있음직한 가능성보다도 더 이상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물론) 그들의 가능성도 거의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Wyatt:당신은 종교의 영향력이 좋았는지 아니면 해로왔는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Russell:저는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그 영향력은 해로왔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이집트 승려들에게는 달력을 제정하고 일/월식(eclipses)을 기록하여 그 당시 그들의 운동을 예측하도록 하였습니다.저는 그러한 것들은 종교의 이로웠던 영향들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거의 대다수 부분은 좋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좋은 증거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과, 거짓조장(falsified)된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왜곡된(falsified) 교육 시스템과 - 제 생각에는 - 문제되고 있는 것들이 옳은지 아니면 틀리는지에 대한 의문들은 제쳐놓고서라도, 이름하여 금기사항들이라고 하는 어떠한 것들을 믿는 것이 올바르며 어떠한 것들은 믿는 것이 틀리다고 하는 완전히 윤리적 금기사항들(heresy)은 믿어야 하도록 하였기에(it was held important), 그것들은 유해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체적으로(In the main), 저는 종교는 대단히 많은 해악을 행해왔다고 생각합니다.크게(Largely) 보수주의를 정당화하고 고대의 습관들을 신봉함으로써, 그리고 여전히 불관용과 증오를 정당화함으로써 말입니다. 엄청난 양의 불관용이 종교로 들어갔는데, 특히 유럽에서 이들은 너무나 끔찍하였습니다.

 

종교의 존재 이유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저서에 의하면 그는 기독교의 가장 잔인한 이론 중 하나는 죽음 이후에 천당과 지옥으로 간다는 교리라고 주장한다. 이유는 인간의 가장 나약한 부분인 공포를 통하여 사람들은 종교에 더욱 귀의하게 하며, 그러한 광적인 상태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폭력적인 불관용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예수의 사상을 검토할 때 '산상수훈'과 같은 위대한 연설에서 어떠한 폭력을 예수가 격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종교 창시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Wyatt:당신의 의미는 자유로운 생각을 막는 어떠한 종류의 사고의 검열이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Russell: 그렇습니다. 예. 제 의미는 당신이 이 세계의 어떠한 학교를 실질적으로 거론한다면-소년들과 소녀들을 위한 어떠한 종류의 학교든지- 당신은 어떠한 종류의 믿음이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국가들에 있어서는 한 종류가 될 것이고, 사회주의 국가들에 있어서는 또다른 것이 될 것입니다.그러나 양자에 있어서 무엇인가가 가르쳐지고 있으며, 가르쳐지고 있는 증거가 치우지지 않도록(impartially) 검사되지 않았고, 어린이들은 다른 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도록 격려되고 있지 않습니다.


Wyatt:수세기를 통하여서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를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Russell:저는 대체적으로 공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어느 정도 무기력하다고 느낍니다.그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연이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천둥으로써 그를 칠 수 있으며 또는 지진에서 그를 삼켜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인간이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인데, 타인들은 전쟁에서 그를 살해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종교와 많은 관계가 있는 것인데, 그의 폭력적인 열정이 그로 하여금 행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데 -그러한 것들은 그가 조용한 순간에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엄청난 양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종교를 이러한 공포들로 하여금 두렵게(frightened)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Wyatt: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창시자들이 그들 스스로가 항상 언급한 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Russell:예,그러나 종교의 창시자들은 -저는 다수의 종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추종자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거의 관련이 희박합니다. 사실상 매우 적은 편이지요.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저는 군대에 관련된 사람들이 기독교 믿음은 동구권 세력과의 경쟁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과 그들은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면 다시는 (경쟁에 관련된) 그러한 일에 있어서 열정적(vigorous)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근래에 알았습니다. 음, 저는 산상수훈을 다시 주의깊게 읽었지만 (저는) 그 안에서 수소폭탄을 격려하는 어떠한 단어도 찾지를 못하였습니다. 단 하나의 단어도.

 

종교의 해악

아래의 대화 내용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앞에서 역사적인 큰 흐름에서 -특히 유럽에서 - 기독교는 다른 생각에 대하여 매우 편협한 불관용의 잔인성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종교가 교조적으로 빠질 때 자기 종교 공동체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회가 처한 진정 시급한 이슈에 대한 문제 의식과는 상관없는 작은 이슈들로 집중력이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 실례로 거대한 로마제국의 말기에 국방과 세금을 개혁하여 그 사회 공동체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려고 하려는 노력보다는 일부 종교 수장들은 처녀성에 대한 강조를 하고, 오히려 국가를 위한 선행적인 개혁에는 신경을 쓰지 않도록 가르쳤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에 의하여 더 조사될 가치가 있는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현 여호와 증인은 그러한 대표적인 종교 중 하나이다. 여호와 증인에 대한 수많은 장점과 단점 중 이 종교가 주장하는 전통적인 뿌리는 로마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의 삶을 따라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 21세기 지금 가능한가하는 현실적인 비교도 흥미있지만 그들은 철저히 선거와 같은 국가 제도에 참여하는 것을 교리적 차원에서 지양시키고 있다.

또한 일반 기독교 역시 문제가 없지 않은 것이, 2020년 전 세계가 바이러스 창궐로 모든 국가의 방역이 시급한 상황에서 특정 기독교 모임에서 일요일 집회를 고집하고, 자신들의 전통을 고집하면서 따르지 않았던 것들은 매우 구체적인 예이다. 

Wyatt:예,그렇다면 당신은 오늘날에 있어서 종교는 아직도 해악하다고 생각을 하시고 있습니까?제 말은 당신의 비판하고 있는 대다수의 일들은 오래된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아니냐고 하는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Russell:오늘날도 단지 똑같다고 봅니다. 제가 당신에게 예를 들었던 수소폭탄의 예는, 제가 원했던 만큼 확실하게 적합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교회들에서 구체화된(embodied) 평상시 매일매일의 종교는 대체적으로(in the main) 그다지 중요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서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정직한 생각을 감쇄(discourage)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치에 대한 감각(sense of importance)은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보여집니다.


Wyatt:그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Russell:예, 물론입니다. 로마제국이 쇠퇴해가고 있을 때, 종교의 수장(Father)들은 로마제국의 몰락을 크게 심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걱정하였던 것들은 어떻게 처녀의 순결성(virginity)을 유지하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Wyatt:그 당시에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Russell:그들은 사람들에게 적의 군대들이 국경선에 모여들고, 세금제도를 개혁하여야 한다는 것들에 대하여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신경쓰지 않도록 간곡히 훈계하였습니다. 그들은 제국을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 있어서 만약 인류가 서서히 멸망해가고 있을 때, 우리 모두가 멸망해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세계전쟁을 막는 것보다 인공수정을 막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저명한 성직자들을 발견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저에게 균형감각의 부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교의 긍정적 영향

아래의 대화 내용은 러셀의 종교에 대한 근본 철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다.

러셀은 다시 강조하지만 종교가 교육과 소외받는 민중에 대한 위로와 같은 긍정적인 부분을 최소한 인정을 하지만, 여전히 종교의 근본적인 호소는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은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좋은 예인지 검토가 필요하지만, 2차 대전시 독일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학살의 시작은 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 시민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을 교묘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한 원인이라는 학설이 있다. 이러한 고찰은 여전히 현실에서 지금도 벌어지는데 일본 내에서 혐한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일반 일본인들이 가진 어떠한 두려움에 대한 공포를 외부로 돌리려고 하는 흐름이 있다. 

일본 시민과 대다수 사람들이 가진 역사적 지리적 한계 내에서 자의식 속에는, 그들이 가진 열등감과 우월감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대다수의 일본 민중은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가 있던 섬 안에서 다이묘의 지배 아래 칼이 일상에 자신들의 복종을 강요하는 일생을 살아 왔다. 근래에 유명한 롯본기 김교수가 보다 새롭고 심층적인 분석으로 언급을 한 내용이지만 일본 안에서 벌어지는 자살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식으로 일어난다는 지적은 매우 흥미로운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의외로 심한 공격성은 오래된 공포와 압박에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가 가진 위대한 사상에 근거한) 사랑이나 헌신등을 통한 공동체와의 조화를 말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신자들에게 어떠한 식의 공포를 통해서 가르침을 주는 경우 이는 사회적으로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Wyatt:예,하지만 당신은 종교들은 좋은 것들을 해오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는 않으십니까? 말하자면 다른 어떠한 가능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을 때 교육을 전파하고, 버마에서와 같이 - 예를 들어서 - 불교의 승려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직업교육을 해오고 있지 않습니까?
Russell: 음, 예. 그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베네딕트 파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좋은 일들을 일정량 수행하였지만, 단지 유해한 행위를 한 후에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Wyatt:하지만 믿음이나 종교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 또는 삶을 대면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Russell:저는 여타한 영역에서(in any other sphere) 어떠한 종류의 겁이든 표현하는 사람들은 수치스럽게 간주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종교적 영역(sphere)에 있어서 이러한 것은 존경스럽게 생각됩니다. 저는 어떠한 영역(sphere) 안에서건 겁(cowardice)을 존경스러워할 수 없습니다.


Wyatt:그러나 왜 당신은 이것을 겁이라고 말씀하십니까?
Russell: 당신이 이것이나 저것이 없이 삶을 직면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삶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그들의 삶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당연히, 그러한 것은 (삶의) 일정한 부분....입니다.


Wyatt:그러나 당신은 어떠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문제들을 퍼내어서 신 또는 승려들, 말하자면 조직화된 종교에게로 떠맡기고 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스스로 직면하지 않는 것을 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Russell:예, 그렇습니다. 지금 이 세계가 처해 있는 매우 위험한 조건들의 전체 의문을 들어봅시다. 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편지를 받습니다."오, 신께서 그 일을 돌봐주실 것입니다.( Oh, God will look after it)". 그러한 과거에 그는 결코 (돌봐주시기 위해) 있지 않았습니다.저는 왜 사람들이 신께서 미래에는 (돌봐주시기 위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종교의 익숙함

러셀은 1920년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한 후, 연이어 중국에 들려서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북경 대학에서 철학에 대한 강의를 하고 돌아온다. 그의 중국에 대한 선호적인 의식은 이 당시 방문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이해되어지는데 그는 중국인들이 특별한 종교를 믿지 않고 있다고 관찰을 하였다. 아마도 그들이 가진 역사적 전통 아래에서 노장자와 불교가 사회 깊숙이 어떤 식으로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셀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는 하나의 습관적인 어떤 익숙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를 믿는 것이 행복할 것이라는 필요 조건과 같은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행복에 대한 러셀의 주장은 [행복론]이라는 저서에 매우 설득력있고 의미있게 이야기되어있다.

Wyatt:당신의 의미는 이러한 일들은 따르기에는 매우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이러한 일들은 당신(스스로)을 위해 어느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를 돕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Russell:분명히 그렇습니다.


Wyatt:그러나 만약 종교가 해악하다면,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의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항상 주장을 하고 있는데 무엇이 해답이 될 수 있습니까?
Russell:아. 사람들은 항상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주장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어떠한 나라에서는 한 예로 사람들은 죽마를 타고 걸어다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마가 없이 걷기를 싫어합니다. 종교는 단지 그러한 것과 같습니다. 어떠한 나라에서는 그러한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저는 중국에서 1년의 시간을 보냈는데, 평범한 보통의 중국인들은 무슨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들을 단지 평범하게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생각에 그들의 주어진 나쁜 환경 아래에서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했던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Wyatt:그러나 저는, 기독교인들은 만약 그들이 중국인들을 기독교인으로 교화시키면 그들은 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할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Russell:음, 저는 그러한 것이 전혀 증거로서 확인할수 없는 사실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미래

앞으로의 종교의 미래에 대한 러셀의 견해는 매우 상식적이고 논리적이다. 동아시아에서도 민중의 고통이 커질수록 불교의 영향력이 커졌듯이 서구 유럽의 종교 역시 수많은 전쟁과 질병, 수탈의 역사를 지내오면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인간이 사회 문제를 잘 풀어가는 동안에는 종교의 필요성을 크게 줄어들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는 과거의 역사에서 본 것과 같이 종교는 계속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위엣트(Wyatt)은 종교가 형이상학적으로는 인간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기반으로인간이 존엄성 을 지향하는 면에서 발전한 면이 있지 않냐고 묻지만, 러셀의 답변은 개개인의 존재보다 더 큰 것은 가까이는 가족부터 공동체의 구성까지 여러가지가 있다고 다소 비판적으로 대답을 한다. 그의 의도는 이러한 종교에 빼앗기는 인간의 노력이 다른 생산적이고 더 가치있는 문제에 집중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다.

단지 서구 역사와 그를 둘러싼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는 매우 해박한 노 철학자이지만, 그의 동양 철학과 특히 불교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물론 그의 유명한 저서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는 직접 예수와 부다를 비교하여 예수의 독선을 비난하는 논점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21세기에 들어서서 서구 유럽에 불교가 서서히 퍼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현상은 그가 진단하는 것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부분도 있다. 과학 발전과 사회 문제의 안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인간이 가진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들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 많은 서구인들이 탁닉한이나 입적하신 숭산스님의 제자로서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사례들을 볼 때, 러셀 본인이 불교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를 했다고 보아지지 않는다.오히려 이 부분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주장에 더 깊은 고찰과 우리들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다고 이해된다. 

Wyatt:예, 그렇다면 인간들은 그의 외부에 있는, 그 자신보다 큰 존재로 나타나는 것들에 대한 믿음의 이유를 추구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겁의 문제이거나 신념에 기대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신념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Russell:음, 그러나 세상에는 그 자신들보다 큰 존재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제 말은 첫째로 당신의 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국가가 있으며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류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스스로들보다는 커다란 존재이며, 그러한 것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우호적인 것들에 대한 어떠한 참된 감정들이라도 차지할 만큼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Wyatt:당신은 조직화된 종교는 인류에 대하여 같은 방식의 지배력(grip)을 가지는 것을 항상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Russell:그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냐 아니냐 하는 것에 의존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만약 큰 전쟁들이 있거나, 큰 억압들, 그리고 많은 인간들이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진다면, 아마도 종교는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신의 선함에 대한 믿음이 그에 따른 증거(evidence)와 반비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어떠한 증거(evidence)도 없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잘 진행되고 있으며 당신은 그러한 일들에 대해 믿을만 할 때 사람들은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약 사람들이 그들의 사회적 문제들을 잘 풀어나갈 때 종교는 쇠멸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면,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면(그들의 문제들을 풀어나가지 못한다면) 종교는 쇠멸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당신은 과거에서 그에 대한 예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18세기에 대부분의 일들이 조용하였을 때, 엄청나게 많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자유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음,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어떠한 영국인 귀족들은 자유주의적 사고가 단두대를 만들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며, 그들 귀족들은 그 사고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깊이 종교적이 되었으며 당신은 빅토리아인들로 알고 있는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일들이 러시아 혁명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으며, 그들은 만약 그들이 신을 믿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소유물들은 사적재산몰수(confiscated)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들은 신을 믿었습니다. 제 생각에 당신은 이러한 사회적 격변(upheavals)들이 종교에 있어서 매우 좋은 것임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Wyatt:당신은 우리가 죽는다면, 당신과 내가 완전하게 소멸(snuffed out)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Russell:물론 그렇습니다. 저는 왜 그러면 안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육체가 소멸된다고 알고 있으며, 정신은 육체가 소멸하여도 유지되어야 할 어떠한 가정을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https://dailynews.mcmaster.ca/articles/honorary-archivist-ken-blackwell-how-i-met-bertrand-russell-and-other-stories/

 

Honorary Archivist Ken Blackwell: How I met Bertrand Russell and other stories

Ken Blackwell has spent the last five decades studying the archives of pacifist, philosopher and Nobel laureate, Bertrand Russell. Now, he offers personal insights on what it was like to meet Russell and to work with the papers of one of greatest intellect

dailynews.mcmaster.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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