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Dry September(단편-윌리엄 포크너)

2020. 9. 22. 00:45북미 이야기/가벼운 책 이야기

단편소설 - Dry September

다시 읽게 된 윌리엄 포크너

근래 미국 남북 전쟁을 중심으로 북미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사를 하면서 미국 문학에서 말하는 남부 역사와 흑백 갈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읽었던 작품이지만 책을 버리지 않고 있어서 거의 15년 만에 다시 읽었는데도 (학점을 위해 읽고 시험을 보았던 작품이었는데도) 내 이해도가 20%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일반 직장인들이나 경제활동을 하는 생활인들에게 이런 독서는 사치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작품을 읽고 한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갈등과 인간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언제고 서울 지하철의 노숙자 중 어느 한 분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 가장 큰 계기 중 하나가 우연히 제공된 문학 작품을 읽고나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난다.

인간은 복잡하고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어떤 이에게는 문학은 "소설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 시간 낭비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갖게 한다.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적이든 간에 어떤 사람에게 힘을 주고 계기를 준다면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90년 학교에서 포크너의 유명한 작품인 "에밀리에게 장미를 (A Rose for Emily)" 라는 단편을 처음 접하면서 느꼈던 결말에 아주 신선한 충격과 불편한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학교를 떠난 후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다른 작품(단편/장편) - "압살롬 압살롬" 이나 "As I lay dying(내가 누워서 죽어가며)" - 들을 접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작가 "포크너"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작품 개요

이야기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한다. 포크너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가상의 남부 마을인 제퍼슨(Jefferson)의 한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던 고객들과 한 이발사인 헉쇼(Hawkshaw)와의 대화로 시작한다. 대화는 마을의 30대 후반인 백인 여성 쿠퍼(Miss Minnie Cooper)가 흑인 윌(Will Mayes)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로 언쟁을 벌인다. 흑인 윌을 잘 알고 그가 "결코 그런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이발사의 말에 화가 난 다른 백인들은 전쟁 베테랑이었던 존(John McLendon)을 중심으로 윌을 찾아가서 결국 그를 살해하는 비극의 결론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일단 5장으로 구성된 단편은 처음 1장과 3장에서는 쿠퍼 양이 흑인 윌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소문에 대한 제퍼슨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흑인 윌을 죽이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2장과 4장에서는 쿠퍼 양의 개인적 이력과 심리적인 상황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집에 돌아온 존이 그가 집에서 아내에게 어떻게 폭군으로 대하는지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작품에 드러난 미국 남부의 흑백 갈등

이 단편은 최초 1931년 한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다가 나중에 포크너의 단편집에 취합이 된 작품이다. 1931년이라는 90년 전의 미국 남부의 상황이 어떠했는 지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단 작품 제목이 우리 말로는 "건조한 9월"(Dry September)에 해당하는 것과 같이, 남부의 "62일 여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aftermath of sixty-two rainless days"는 작가의 표현만큼 모든 것이 메말라가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발사는 (살아있지 않는 공기 속에 거칠고 폭력적인 긴장 안에서 번쩍이는, 벌레들이 빙빙 돌고 있는 희박한 불빛이 있는) 길가로 빠르게 올라갔다.("The barber went swiftly up the street where the sparse lights insect-swirled, glared in rigid and violent suspension in the lifeless air")". 3장을 시작하는 이 문장의 표현은 전체적으로 답답한 삶의 모습들을 하나의 그림 같이 보여준다. 무언가 외부에서 커다란 비바람이나 폭풍이 몰아쳐 시원하게 몰아내기 까지는 어떠한 변화도 없어 보이는 질식할 것 같은 건조함이다.

실제로 윌을 죽이는 비극으로 향하면서, 모두가 흥분하고 화를 내며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지만 그러한 가운데 모두가 일정한 피해자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마도 이러한 구성은 작가가 의도한 장치일 수도 있는데, 특히 마지막 일을 마치고 돌아온 존의 집안에서 그의 아내가 남편을 두렵게 맞이하고 그녀가 항상 상습적인 폭행에서 시달리며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작품이 끝나갈 때 작가의 의도는 더욱 드러난다.

이 경우 가해자인 존은 과연 행복한가.. 당연히 행복할 수 없다. 자신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던 거대한 어떤 증오가 자신의 준거집단에 대한 가치관으로 바뀌어 "자신의 삶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신념 중 하나"로 자리잡고 살아가는 삶. 사실 이러한 왜곡은 미국 남부에만 존재했던 문제가 아니다.

우리와 우리 주변만 바라보아도 이러한 현상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도 일정하게 존재하는 보편적인 문제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20세기를 거쳐 우리 한국 사회가 거쳐 온 잔인한 이념의 폭력성, 바로 옆 나라 일본에 존재하는 혐한에 대한 정서, (내가 볼 때는 분명히 일당 독재의 전체주의적 사회인데도) 스스로는 "자신들의 고유한 민주주의가 있다"고 믿는 현재의 많은 중국인들.. 사람이 사는 어느 곳이나 이러한 문제는 존재한다.

이러한 1920-30년 대의 남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포크너의 의도는 매우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는 현재 한국의 김훈 작가가 말하듯이 어떤 사실에 대해서 '논평'하지 않고 단지 '망원경'을 통해 같이 바라보게 하는 느낌을 같게 한다. 같이 바라보는 사실들이 불편하면 불편할 수록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것 같이 보인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의식들이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중요한 인물인 쿠퍼 양 역시 자신의 마을 내에서 백인 여자로서 가진 어떠한 이미지를 위해서 살아가는 허영의 희생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포크너의 다른 작품인 '에밀리에게 장미를'에 나오는 에밀리를 연상하게 한다. 그녀가 30대 후반으로 나이가 들어가며 더 이상 남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시기가 다가올 수록 "외부에 보여지는" 자신에게만 집착을 갖는다면, 그녀의 의식 역시 왜곡된 것일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의식을 우리에게 만들어 놓는가.

그것은 노력하지 않는 개인일 수도 있고, 그 이전에 그 사회가 만들어가는 수많은 문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신문, 방송과 같은 미디어와 사람들의 보편적인 가치관, 생활 관습 등 여러가지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어떻게 이런 집단적인 의식 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모든 사회에게 주어진 도전이자 과제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다른 작가 하퍼(Harper Lee)에 쓰여진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가 생각이 났다. 오히려 북미에서는 이 작품이 많은 학교에서 영문학 시간에 교재로 채택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나 역시 자녀가 9학년 한 학기 이 책을 배워서 같이 읽어볼기회가 있었다. 이 서평을 쓰면서 흥미롭게 느낀 것은, "앵무새 죽이기" 작품도 같은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루지만 짧고 빠르게 진행되는 "Dry September"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흑백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책과 비교하는 서평을 쓰는 것도 생각 중이다.)

 

Charlotte 에서의 개인적인 경험

개인적으로 2018년 노스 캐롤라이나의 샬롯(Charlotte) 이라는 도시에서 반년이 조금 되지 않는 시간을 혼자 거주한 적이 있다. 내가 다니던 FinTech 회사가 만든 소프트웨어를 고객인 Bank of America 에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추가로 몇 명의 지원 요청이 있었다. 2월인가 아직도 추웠던 토론토에 비해서 샬롯에 처음 내렸던 기억은 벌써 봄이 오는 듯한 따뜻함이 느껴지던 도시였다.

처음 한 달은 은행에서 제공해준 숙소에서 지내고 그 다음 달 부터는 혼자 거주할 자취방을 찾던 중, 한 흑인 부부 집에 깨끗하고 저렴한 방이 나와서 들어갔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에 흑인들에 대해서 옆에서 바라보고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거주한 집의 주인여자는 뉴욕에서, 남편은 플로리다에서 각각 혼자 살다가, 둘이 만나서 중간 위치인 샬롯에 와서 정착을 한 경우였다.

한 가지 흥미롭게 느낀 것은 회사 내에서는 흑인, 백인, 인도인 그리고 나와 같은 아시아 인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는 반면, 작은 시내 중심가에 나가보면 항상 사람들은 흑인과 백인 인종간에 그룹이 확연히 구분되어 몰려 다닌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집 주인이 매주 다니는 교회를 보면 더욱 확연히 느껴졌다. 그들이 다니는 교회는 흑인들만 다니는 교회로 회사 일을 제외하고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흑인들이었다.

Charlotte (North Carolina) 시내 중심가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하기에는 매우 무리이지만, 미국 남북 전쟁이 시작할 때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남부군이 뭉친 역사를 돌아보면 이곳도 흑백 갈등에 따른 역사적인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트란트 러셀도 지적을 했지만 미국이 만들어진 독립운동 당시 초창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매우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일정한 미국의 자기 정체성을 만들었다는 지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수많은 문제들의 사회적 갈등은 남북 전쟁 직전까지 정점으로 치닫다가 남북 전쟁을 통해 값비싼 피의 댓가를 치렀다. 그리고 암살이라는 형태였지만 그 해결을 바라던 지도자 링컨 역시 피의 댓가를 피해가지 못하고 마치 종교적 순교를 하듯이 그의 삶이 역사에 헌정되었다. 현재의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한 (총기 사고와 연결된) ①"폭력"과 (노예제도로 시작한 인종) ②"차별"과 같이 끝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갈등과 반목은 이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업보"이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안고가야 할 사회적 "숙제"이다.  

 

[1] CliffNotes

www.cliffsnotes.com/literature/f/faulkners-short-stories/summary-and-analysis-dry-september/introduction

[] Youtube: Analysis on [Dry September]

www.youtube.com/watch?v=tGqfAS5HLzw

[] Review

sittingbee.com/dry-september-william-faulkner/

[] Quizz on Story

www.bookrags.com/studyguide-selected-short-stories-faulkner/free-quiz.html#gsc.ta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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