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3. 23:49ㆍ북미 이야기/작은 역사 이야기
불런(Bull Run) 전투
섬터 요새에 대한 남부의 선제 공격이 있은 후 북부와 남부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인구가 많던 버지니아가 남부에 합류하면서 남부 연맹은 감사의 표시로 연맹(Confederation)의 수도를 버지니아의 주도인 리치몬드(Richmond)로 정하였다. 이는 미합중국 수도인 워싱턴과의 직선 거리를 비교해도 대략 160키로(100마일) 정도에 불과한 지근 거리에 서로 위치해 있었다. 당시의 여러가지 기록에 의하면 양측 모두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던 것으로 보인다.
첫번 째 교전은 워싱턴 D.C. 수도와 25마일 정도 떨어진 불런(Bull Run) 지역에서 양측이 맞붙은 것인데, 북부 연합의 지휘관은 맥도웰(Irvin McDowell)장군이었고, 남부 연맹은 잭슨 장군(Thomas J. Jackson)의 지휘 아래에 있었다. 경험이 매우 부족한 약 30,000명의 병사들로 구성된 북부군 지휘관 맥도웰 장군에게 링컨 대통령은 "양측 모두 경험이 부족한 것은 동일한 조건(You are green, it is true, but they are green also)"이라며 과감히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전쟁의 양상은 이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북부군의 첫 공격을 막아낸 남부군의 역습에 북부군은 패닉되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전투는 수도와도 가까운 지역이라 일반 민간인들도 소풍 삼아 구경을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전혀 예상과 다른 패퇴를 지켜보면서 전쟁이 장기화될 수 있겠다라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승리를 한 남부군은 지치고 정돈되지 않은 상태여서 더 이상의 지속적인 공격을 하지 않아 워싱턴 수도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행운이었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 링컨 대통령은 50만명의 추가 징집을 결심하였다. 이번에는 최초 전쟁이 시작될 때와 같은 3개월 짧은 기간의 병역 의무가 아닌 3년이라는 비교적 긴 기간의 징병이었다. 다른 하나의 변화는 북부군 사령관으로 맥클랠린(George McClellan)장군을 임명하였다.
샤일로 전투 (Shiloh)
1862년 2월부터 서부 전역의 테네시(Tennessee)주 서쪽 지역을 북부군의 그랜트(Ulysses S. Grant) 장군 지휘 아래 공격하기 시작하였다.그랜트 장군의 부대는 11일 동안 남부의 전략적인 요새 2개를 탈취했다. 헨리(Fort Henry) 와 도넬슨(Fort Donelson) 두 개의 요새 공략을 성공한 후, 약 한 달 후 그랜트 장군의 부대는 테네시 지역의 작은 샤일로(Shiloh)라는 교회 근처에서 숙영을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아래 우측 지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테네시에 속하였지만 미시시피 그리고 알라바마 다른 2개의 주와 매우 인접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샤일로 지역의 우측에는 테네스 강이 흐르고 있다.
4월 6일 남부 연맹군의 기습으로 수많은 북부군 병사들이 쉬는 도중 희생이 되었다. 다음 날 그랜트 장군은 부대를 재집결하여 반격을 하여 남부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에서 양측은 전투에 가담한 전체 10만명 중 대략 1/4이 희생되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이전까지 전투 중 독립전쟁과 1812년 영국과의 전쟁, 그리고 멕시코 전쟁의 모든 피해를 더한 것보다 더 큰 사상자가 집계된 기록을 남겼다.
양 측은 이 전투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는데, 반드시 전초를 보내서 적의 움직임을 예측해야 한다는 것과, 참호를 파고 주둔지를 요새화(fortification)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상자 관점에서 전쟁은 무승부 같이 끝났으나, 장기적인 면에서 북부군에게 미시시피를 공격할 수 있는 방향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점과 남부를 좌우로 분단시켰다는 면에서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엔티텀 전투 (Antietam)
한편 다시 동부 전역에서는 북부군은 맥클랜른(McClellan) 장군을 중심으로, 남부군는 - 지속적인 교전으로 큰 부상을 입은 존스톤(Joseph E. Johnston) 장군을 대신한 - 리(Robert E. Lee) 장군의 지휘 아래에 계속적인 전투를 하고 있었다. 남부군은 비록 "7일 전투"(Seven Days’ Battles)에서 적은 병사의 수와 더 많은 피해자가 생겼지만, 버지니아 수도를 사수하겠다는 리 장군의 굳은 결심으로 버지니아 수도를 공격한 북부군을 막아내며 맥클랜른 장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리 장군은 적의 수도인 위싱턴으로 향하면서 두 번째 불런 전투에서도 승리를 하고 메릴랜드(Maryland) 주의 포타맥(Potomac) 강을 건넜다. 엔티텀(Antietam) 전투에서 맥클랜른 장군에게는 매우 큰 행운이 찾아왔다. 그것은 북부군 상사 한 명이 남부군이 주둔하였던 숙영지를 정찰하면서 담배를 싼 종이에서 리 장군의 명령이 적힌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그 메모를 통해서 북부군은, 남부군의 리 장군과 잭슨 장군이 일시적이지만 남부군이 서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고를 받은 맥클랜른 장군은 9월 17일 전면 공격을 감행하고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26,000명 (22,000 - 26,000명 추산) 이상의 큰 사상자의 전투로 다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전체 남부군의 1/4 이상의 큰 피해를 입은 가운데 양측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맥클랜른 장군은 - 링컨 대통령이 맥클랜른 장군에 대해서 항상 느리다(the slows)고 불만을 토하던 대로 - 이번에도 너무 신중하여 더 이상 전과 확대를 위한 추격을 하지 않았고, 남부군은 포토맥(Potomac) 강을 다시 넘어 버지니아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에 실망한 링컨 대통령은 맥클랜른 장군을 해임하였다.
하지만 워싱턴으로의 공격을 막아낸 이 전투로 인하여 링컨 대통령은 얼마 후 노예해방 선언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할 수 있는 입지를 만들어 주었다.
[1] Antietam 기록
storymaps.esri.com/stories/civilwar/
[2] Shiloh 기록
www.battlefields.org/learn/maps/battle-shiloh-april-7-1862
[3] Youtube on Shiloh
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6&v=Tlhlk3bp-f4&feature=emb_lo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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