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작은 새의 죽음

2021. 8. 31. 21:11자연과명상/자연과문화

8 월 21일 (토, 2021) 오후인가 아내가 다니는 장로교회에서 회의가 있어서 다녀왔다. 거실에 들어왔는데 아내가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하며 피아노 위에 올려놓은 (아래 사진 속의) 작은 새를 보여주었다. 깜짝 놀랐다.

죽기 10분 전의 새의 모습

이름도 모르는 새를 어떻게 데리고 왔냐고 물어보니, 잔디 물을 주는데 도망가지 않고 비실 대며 바닥에 있기에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간혹 눈을 떴지만 대부분은 눈을 감고 미세하게 흔들리며 서 있었다.

집에 있는 강아지가 건들지 못하게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는 사이에 아내의 교회 친구 분이 집에 차를 마시러 왔었다. 조금 편하게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헝겊 위에 새를 올려 두고 물을 주어도 전혀 미동이 없었다. 간혹 아내가 와서 건들면 그때서야 가끔 눈을 뜨거나 날개 짓을 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차를 마시러 온 여자 집사님과 아내와 같이 새를 가운데 둔 탁자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던 중, 10분 후에 유리 탁자 위에 쓰러졌다. 처음에는 힘들어서 그런가하고 내 두 손으로 안아 주었는데 아까 피아노 위에서 만질 때와 다르게 벌써 몸은 식어가고 있었다.  손을 씻으러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아내가 밖에 정원에 묻어주었다.

새가 죽은 후 10일 가량 되었지만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면서 날아다니는 새를 유심히 보게 된다.

이렇게나 죽음이 가벼울 수가 있구나.. 누구도 슬퍼해주는 사람도 없이..

개인적으로는 2014년 아버지의 임종 때 양손을 꼭 잡고 운명 하시는 것을 포함해서 다른 살아있던 생명이 내 양손 안에서 죽은 두 번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한 이솝 우화 같이만 느껴지던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 중 어느 도망가던 한 새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 전체를 동등하게 바치던 이야기가 다시금 생각났다.

만약 (아직 한번도 죽여 본 적이 없지만..)  내가 쥐와 같은 설치류의 죽음에 이렇게 슬퍼했을까 생각을 해본다.  위생상 위험한 이러한 종의 번식을 "창궐"이라고 표현 하듯이 아마도 똑 같이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인간이 지구 상에서 살아가면서 혼자서 만이 우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였다. 그런 면에서 (나이가 들수록)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우리 인간을 위해서 다른 모든 생명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 작은 새도 어미나 형제가 있었을 것이다. 내 손에서 죽었을 때 누구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지만, 죽기 직전까지 갸냘픈 두 다리에 의지해서 꼿꼿이 서 있던 모습은 내가 아는 어느 죽음보다 품위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슬픔"의 부담을 주지 않으며 무겁지 않은 몸 전체를 죽기 직전까지 ...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만 "서" 있는 모습은 ... 사실 "존귀"하다.

나는 석가모니가 이천 육백년 전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해질 때가 종종 있다. 그 분도 이러한 수많은 삶과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하였지만.. (나와는 다르게) 이러한 수많은 헤어짐에 대한 어떠한 '위안'을 찾으셨는지.. 그리고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

나는 나 자신을 한없이 자책했다. 나의 손 안에서 이 작은 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작은 존재의 죽음조차 도와줄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에 ...

도대체 나는 반 백년이라는 세월을 무슨 허영으로 보냈는지.. 나 역시 병들고.. 나는 무겁고 느리기만 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작은 존재조차, 이렇게나 죽음이 가볍지만 우아할 수 있구나..

https://www.youtube.com/watch?v=pBlcAt9M5j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