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 라즈니쉬 이야기 - 후기5(마침)

2020. 8. 12. 21:54북미 이야기/작은 역사 이야기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본 라즈니쉬 공동체

나는 이 라즈니쉬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서 종교가 가진 수많은 모습 중.. 비지니스로서의 종교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처음에는 진리와 삶의 고통에서 해답을 얻으려는 많은 민중들의 갈구 속에서, 처음에는 어떠한 순수한 위안을 주는 종교적인 가르침이 많은 대중들에 의해 선택되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항상 그러한 모임이 커지고 공동체가 단순한 말과 가르침으로만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 때 그들은 사업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고 세상의 정치 사회적 경제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처음에는 민중들에 의해 선택된 그 종교가 세속화가 되면 될수록 그 구성원들은 (마르크스가 자본에 의해 노동자가 처하게 된다고 주장한 바로 그) '소외'가 되기 시작한다. 

 

라즈니쉬 공동체가 그들의 추종자들이 명상센터에 방문해서 라즈니쉬를 통해서 명상 수업을 듣고 지불하는 수업료의 가격을 개인적으로 조사하면서 매우 비싼 비용에 당황하였다. 가령 아래 표를 보면 10일 가량 수업을 하는 명상 훈련은 한화 약 40만원(미화 400 불)이며, 한 달이 조금 넘는 Rajneesh Chakra and Energy 라는 교육은 약 3백만원 (미화 3100 불) 정도였다. 1985년이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저렴한 가격의 명상 교육은 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985년 라즈니쉬 명상 훈련 소개 팜플렛

 

다른 불교와 기독교 분파들에서의 경제적 공동체 

다른 예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이곳 북미에 와서 우연하게 여호와 증인과 일본 불교인 국제창가학회 (SGI) 한국에서는 남녀호랑개교 라는 모임에 몇 번 참석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 모임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어느 정도 규모가 큰 이 종교 단체들이 엄청난 경제적인 규모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면서이다. 

 

사실 여호와 증인들의 놀랄만한 자원봉사 시간은 보통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와취타워 협회에서 관리하는 캐나다에서의 증인들 노후 복지 시설을 본 후 내가 알던 것들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한국 전통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창가학회는 매우 이상한 불교 단체이다. 대략 각 종파가 중시하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이 조계종은 금강경이라면, 창각회는 법화경 정도라는 정도의 차이만 나는 처음에 알고 있었다. 그 이해 안에는 법화경 정도의 불경을 주 경전으로 한다는 것은 부다의 가르침을 큰 흐름에서 따르는 대승불교의 명백한 한 지류라고 나는 인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두 종교의 차이는 장로교와 로마정교회 이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로마정교회는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한 이후 동 서 로마로 나누어 지면서 카톨릭과 로마정교회롤 나누어 졌다. 로마정교회는 이곳 회사에서 친했던 동유럽 사람들이나 러시아 인들을 통해 많이 듣고 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마치 소승과 대승불교 같이, 그들은 정치적 지리적 위치가 달라서 그 문화에 맞게 변형되어 갔지만 서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카톨릭 문화 내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을 같은 영적인 신의 종교라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배제는 미 대륙으로 넘어와서 다시 분파된 몰몬교나 여호와 증인에서 더욱 극단적인 주장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 이전에 칼빈에 의하여 토대가 구축된 장로교도 처음에는 이단이었지만 지금은 개신교라는 커다란 흐름 안에서는 가장 정통적인 기독교 분파로서 존재한다.

 

내가 프로테스탄트를 이해하는 가장 큰 철학적 배경은 (러셀의 주장이기도 하는데) 매우 역사 경제적인 맥락에서이다.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 중상주의로 인한 자본가의 등장으로, 더 이상 카톨릭의 교리와 사상은 이들 세력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유지시킬 수가 없었다. 비록 결혼을 하지 않는 성직자들이 로마 교황청에 의해서 통제를 받고 수행을 하는 듯 보이지만 매우 타락한 수많은 역사를 가지고 있던 당시 카톨릭의 위선에 비해,  '현실의 경제적 보상은 지금의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이라는 칼빈 사상이 정확하게 자본가들에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부분은 그 이후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경제적 공동체 모습 역시 자본가들의 회사 창립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가끔 기독교에서 어느 목사님이 '개척' 하시러 간다고 할 때 나는 그 개척이라는 단어가 성스러운 하나님의 사업을 만드는 작업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작은 밴처 기업을 시작하는 인상을 더 자주 갖게 된다.

 

이런 장로교와 로마 정교를 같은 종교로 보기 힘든 만큼, 한국 조계종과 일본 창각회가 동일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종교의 테두리 안에 같이 있다고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직접 방문해서 지켜본 창각회는 (불교라고는 하지만) 부처님의 이야기보다는 창시자인 니치렌을, 특히 지금 모임의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의 가르침이 더 많이 그들의 교재에 적혀 있었고, 그것을 종교 행사 중 더 많이 언급하고 공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적 행사 도중에 많은 발표자들이 이야기하는 개인 경험담은 대부분 자신의 종교 생활을 중심으로 직장이나 사회 활동을 하면서 얼마나 커다란 경제적 성취나 안정을 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담들이었다. 그리고 행사 이후 친교 시간과 식사 시간에는 (전혀 죄책감이나 거리낌 없이) 육식을 같이 즐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한인 사찰이나 불교 모임에서 같이 식사를 할 때는 (각자가 개인적으로는 육식을 유지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최소한의 채식 위주로 식단을 차리고 부처님 앞에서 공양하는 형식을 갖춘다. 그것을 위선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창각회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에 단지 정직한 것인가.

 

어떤 면에서 창각회는 전통 대승 불교보다는 라즈니쉬의 사상이 지나간 방향과 비슷하게 흘러갔는지도 모른다.  라즈니쉬의 추종자에 백인들을 제외하고 특히 일본인들이 많았다는 것 역시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는 않았다. 라즈니쉬가 많은 젊은이들에게 호감을 주었던 가르침은 성과 같은 욕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다분히 조심스러운 분석이지만, 라즈니쉬는 부다의 사상을 존경하고 배워야 한다고 말해 왔지만, 대승과 소승불교에서 지키려고 하는 부다의 근본적인 자기 욕구의 자제, 살생과 비폭력에 대한 깊은 자아성찰과 같은 부분은 아전인수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창각회 공동체가 (일본 자민당 내에서도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이 있을만큼) 매우 큰 조직이고, 이들 모임의 구성원이 자신들의 모임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희구하는지 이해하면서 이 모임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왜냐하면 2019년 나 자신은 (개인적으로는 전혀 하늘이 나에게 주어진 어떠한 사명도 못 느끼며) 지천명 나이가 넘어 버렸다.  그런 스스로에게 (65 세 이후 캐나다 국가에서 모두에게 주는 최소한의 국가 연금을 제외하고는) 개인 연금도 준비되어 있지 않고 앞으로 퇴직 이후의 노후 대책도 없이, 몸만 심각하게 아픈 상태를 안고 또 다시 시장에 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2020년 지금 나는 앞으로 14년 뒤에 내가 생존할 자신도 많지 않고 확률도 객관적으로 낮은 상황에서 경제적 다음 활동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나 역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생각은 항상 하고 있다.)

 

만약 내가 지금까지 어떤 조직에 오랜 시간 소속 되었고 그  조직 내에서 젊은 내내 일하며 희생하던 모든 것들이 앞으로 나의 노후에 대한 마지막 보장이었다면 나는 그러한 공동체에 대해서 냉정한 사회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 공동체의 사상이 조금 흠이 있다 하더라도 반 사회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면 언제나 존중받을 수 있는 부분들은 많다. 여호와 증인들의 비타협적인 사회적 거리감과 수혈과 같은 상식적 사실에 대한 교조주의적 접근과 같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성에 대한 그들 공동체의 일관된 가르침과 실천을 보면 놀라운 존경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대다수 증인들 구성원들의 성적 순결성은 지구상 어떠한 종교 단체와 비교해도 놀랄만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내가 보았던 창각회 사람들은 매우 선하고 열심히 살아가면서 이케다 선생님의 평화 사상을 열심히 배워가면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들의 영향력이 일본 자민당의 극우 정치인들을 항상 견제한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 하지만 나의 솔직한 심정은 일본 극우 성향의 정치인들로부터 창각회가 오히려 역이용 당하고 있거나 서로가 공생하고 있다고 보여졌다. (만약 창각회 지도부에서 그것을 몰랐다고 하여도 인식있는 과실이냐 미필적 고의냐 하는 정도 밖에는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 하지만 어떻게 시작을 했더라도 20년 이상을 이런 공동체에서 몸 담고 같이 생활을 해 왔다면 나는 철저히 침묵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입장을 비판할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

 

마치는 말

오쇼 라즈니쉬에 대한 글을 쓴 이유는 내가 라즈니쉬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그의 사상이나 명상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명상 지도자에 대한 선입관이 강한 편이었고 그러한 나의 부정적인 편견에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믿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이 6편의 다큐멘터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5번 이상을 반복해보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이고) 냉소적이며 비판적인 시각이 더 강해진 편이다. 나는 이 명상 지도자가 왜 그렇게 유명해졌는지 쉴라와의 관계를 알면서 조금 이해 되었지만 여전히 미화된 부분이 더 많다고 느껴진다.

 

라즈니쉬가 부다(Buddha,부처)에 대한 호감이나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러 매체를 통하여 대중에게 알려질 수록, 나는 (그가 그렇게 부처를 존경했다면) 왜 스님이 되지 않고 자신의 종교를 만들고자 했는지에 대해서 더욱 비판적이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왜 부다가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하는 수행자들에게는 (일반 재가자와는 다른 머리를 깎고 높은 수준의 수많은 규율을 지키는) 승가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규율했는지 다시금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비록 승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이 높은 수행자로서의 규율을 지킨다고 믿지는 않지만,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부다의 이름을 앞에 놓고 수십대의 롤스로이스를 버젓이 갈아 타고 다니면서, 자체 방어를 핑계삼아 자신을 따르는 공동체 재가자들에게 총기를 구입시키고 군사훈련을 시키지는 않는다.

 

내가 이 자료를 정리한 이후에, 역사적인 사실 중 새로이 바라본 사건은 너무나 당연하게 이해되었던 임진왜란 때의 서산대사를 비롯한 조선의 승병들이다. 동아시아 역사상 스님의 사회적 신분을 가장 낮게 만들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왜적이 침입하고 오히려 지도자는 도망가기 바쁘신 와중에,  비록 살생이라는 업을 만들지만, 같이 살아오던 민중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무기를 든 승가자들을 누가 라즈니쉬 공동체의 무장 단체와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들은 수명이 다한 조선 중반기의 시대를 조금은 더 평화적으로 마감하기 위하여 왜구들과 같이 적극적으로 교섭하고 노력한 후에 일본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조금 이상한 결론이지만, 나는 이 사건을 통해 한국 불교의 위대함을 알았다. 비록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지만, 지금의 한국인들이 가진 수많은 장점들 - 총명함, 정의감, 불우한 타인에 대한 진심어린 따뜻한 배려, 어느 나라 사람보다 강인한 인내력, 그리고 배움과 이론은 부족해보여도 강한 실천력을 가진 행동가들이 많다는 사실 - 들이 한국인의 DNA에 있는 듯한 느낌은 착각일까. 이러한 이유에는 역사적/환경적인 수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우리 언어에 스며든 불교 용어 만큼이나 오랜 시간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온) 불교의 가르침도 한 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언어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간단한 명제만 돌이켜 보아도 이는 배제할 수 없는 연관성을 보여주는 듯 하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라즈니쉬 이야기로 끝을 내야할 것 같다. 그는 여행에 세 가지의 배움이 있다고 했다. (1) 타향에 대한 지식, (2)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3)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의 의견에 100% 동의한다. 나는 이 사건들을 통해 (1) 인도와 미국에서 벌어진 불교와 관련된 한 종교 관련 사건을 알았고 (2) 한국 역사에 스며든 불교가 얼마나 위대한 사상을 만들어 왔는지 알았으며 (3) 지금의 남한과 북한이라는 강산에서 수천년 간 민중과 같이 살아왔던 승가의 깊은 전통이 수많은 산사와 산하에 남아 있다는 것, 나는 그러한 것들을 너무도 몰랐고 뒤늦게 너무도 그리워하고 있다는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