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명상/자연과문화(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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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벚꽃 인지
봄 산의 물가에서 모든 엽록소들은 개별적이다. 신생한 이파리의 어린 엽록소들은 빛과 물을 빚어서 유기물을 합성해 내는 것이라고, 식물학 책에는 쓰여져 있는데, 나무의 내부에서 그 '빚어짐'이 어째서 가능한 것인지, 그 '빚어짐'은 사실상 어떤 회피할 수 없는 충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인지, 왜 '빚어지는' 것인지, 그 빚어짐을 가능케 하는 시간과 빛의 은밀한 작용의 질감은 어떤 것인지를 말할 수 없는 한, 내가 읽은 식물학 개론은 결국 '산 나무는 살아간다'는 이 단순한 명료한, 하나 마나 한, 그러나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외마디 비명의 가엾고도 지루한 동어 반복이었다. 풍경과 상처 (산유화 p 77) 김훈 안 사람과 같이 강아지 산책을 하는 덕에 내가 나무 가까이서 찍을 수 있었다. 찍고 보니 실..
2021.04.24 -
[산책]목련 꽃이 피기 전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
2021.04.23 -
[산책] 나무들의 실루엣
전문가들은 나무들의 실루엣 만을 보고서도 나무이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제 봄이 되면서 모든 것들이 소생하는 계절이 되었다. 사철수를 제외한 모든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 남았는데 .. 작은 돌기와 같은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나무 이름들을 배워가는 과정은 나이가 들수록 설레인다. 우리는 과학 기술의 문명 덕에 수많은 편리함을 향유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자연들과 멀어져가는 아쉬움도 있다. 여전히 전나무 (Fir Tree)와 가문비(Spruce) 나무의 차이를 알 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자작나무(Birch)와 사시나무(Aspen)를 구분하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최소한 이러한 것을 알고 싶어하는 현재 이 순간에 나는 행복하다. 자작 나무의 새순을 떼어서 사진을 찍어 한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그 ..
2021.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