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2)
-
[산책] 벚꽃 인지
봄 산의 물가에서 모든 엽록소들은 개별적이다. 신생한 이파리의 어린 엽록소들은 빛과 물을 빚어서 유기물을 합성해 내는 것이라고, 식물학 책에는 쓰여져 있는데, 나무의 내부에서 그 '빚어짐'이 어째서 가능한 것인지, 그 '빚어짐'은 사실상 어떤 회피할 수 없는 충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인지, 왜 '빚어지는' 것인지, 그 빚어짐을 가능케 하는 시간과 빛의 은밀한 작용의 질감은 어떤 것인지를 말할 수 없는 한, 내가 읽은 식물학 개론은 결국 '산 나무는 살아간다'는 이 단순한 명료한, 하나 마나 한, 그러나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외마디 비명의 가엾고도 지루한 동어 반복이었다. 풍경과 상처 (산유화 p 77) 김훈 안 사람과 같이 강아지 산책을 하는 덕에 내가 나무 가까이서 찍을 수 있었다. 찍고 보니 실..
2021.04.24 -
[산책]목련 꽃이 피기 전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
2021.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