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무거운 역사 (2) - 남북전쟁 배경(정치,경제)

2020. 9. 7. 10:51북미 이야기/작은 역사 이야기

남부의 목화 (Cotton) 산업

영국은 1807년 노예 무역을 불법화하였지만 1776년 독립을 선언한 미국 내에서는 여전히 노예 제도가 존속하였다. 1641년 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주에서 노예 제도는 제일 먼저 시작하였지만, 북부에 있는 많은 농장 지주들의 큰 고민 중 하나는 추운 겨울에는 할 일이 없는 노예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여름에만 일을 할 수 있고 추운 겨울에는 각자 자신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자유노동(Free Labor)으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하지만 남부에서는 온화한 기후로 인하여 여전히 노예제도가 존속하였고, 특히 다른 산업에 비해서 이윤이 많이 남는 대농장(Plantation)을 중심으로하는 담배, 쌀, 남색(indigo) 와 같은 산업은 재배에서 수확 사이에 매우 많은 인력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남부의 기후적 특성상 여름철 농사를 지을 때 수많은 모기와 말라리아 병원균으로 백인들보다는, 아프리카/카리브 섬들에서 데려온 온 흑인들이 더 면역력이 있게 보여지면서 노예 제도는 더욱 산업에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이전까지는 목화(Cotton) 산업이 크게 발전하지 않았지만 1793년 엘로 휘트니(Elo Whitney,1765 -1825) 라는 발명가에 의하여 새로운 '목화기계(Cotton Gin)'가 개발되면서 모든 것을 바꾸었다. 이 기계는 씨를 빠른 속도로 분리할 수 있게 해주어서 목화로부터 섬유(Fibers), 실(yarn/thread), 천(fabric) 등을 생산하면서 호황이 시작하였다. 단지 문제는 목화를 심은 땅은 쉽게 황폐화(Deplete) 되어 계속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땅으로 옮겨서 재배를 해야했다. 당시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구입과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지속적인 팽창 중이라 그들의 눈에 서부에는 무한대의 공간이 펼쳐 있었다.

 

경제적으로 남부는 흑인 노예들에 의해 종속되었지만, 심리적으로는 많은 노예 소유자들은 매우 불편하고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은 "만약 (노예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래의 자손들을 살해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If something is not done[about slavery] and soon done, we shall be the murderers of our own children) " 라고 이야기 하였다.

무슨 뜻인가? 이는 당시의 많은 흑인 소유자들은 흑인 폭동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당시의 많은 미국인들은 1791년 프랑스 식민지 령이었던 하이타이(Haiti) 에서 일어난 폭동을 기억하고 있었다. 흑인을 하인으로 데리고 있던 지주들에게는 그러한 폭동이 일어날 경우 흑인들이 자신의 집을 불태우거나 먹는 음식에 독을 넣을 수 있다는 공포를 가지고 생활을 하였던 같다. 

하지만 제퍼슨의 바램과는 다르게 노예제도는 더욱 발전하였고, 1820년 90만 명의 노예는 1860년 (남북 전쟁 직전) 4백만이 넘는 거의 4.5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남부 만이 아닌 북부를 포함한 미국 전체의 경제는 이러한 노예 권력에 의존하는 정부로 통제되어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하게 남부의 흑인 소유자들에게만 이익이 된 것이 아니라 북부의 산업과 상업 파트너들에게 까지 수혜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의 호황을 주도하는 남부 경제와 서부로 넓혀가야만 하는 대농장을 위해서는 흑인 노예 제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제 문제는 "노예제도가 미국의 미래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때였다. 일각에서는 급격한 흑인해방은 흑인들 본인들의 경제적 자립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여서 그들에게도 좋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현재의 경제를 받쳐주고 있는 거대한 시스템을 갑자기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 제도의 이해

1787년 미국 헌법을 만들면서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유권자 투표(popular vote)와 선거인단 투표(electoral voter) 두 가지 방식 중 선거인단 투표 방식을 선택하였다. 이는 미 대륙의 방대한 지역에 따른 의사 소통과 당시의 교통과 통신등을 고려할 때 선거 결과를 끝까지 기다릴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결정한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먼저 각 주별로 선거인단 (electoral college) 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선거인단 내에서 선거인을 결정하게 한다. 선거인의 수는 전체 인구에 따른 비율에 해당하는 숫자만큼 주별로 할당이 된다. 가령 예를 들어 1860년 전체 선거인의 수는 303명에서 멕시코 전쟁으로부터 확장된 지금의 캘리포니아 지역은 4명의 선거인을 할당 받았다. 160년이 흐른 현재는 538명 중 55명의 선거인을 캘리포니아 주에서 결정하게 된다.

조금만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보면 이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전체 유권자 수를 가지고 승자를 판단할 경우에는 모든 지역에서 나오는 투표 결과를 중앙에서 집산해서 판단을 해야 한다. 마지막 한 명의 투표까지 결과를 기다려서 중앙으로 전달을 하기에는 당시의 교통과 통신을 고려하면 더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에 반해서 만약 선거인단 제도를 통해서 절반수 이상이 확실하게 어느 한 주에서 승리할 경우는 나머지 투표 결과를 끝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이 전체 선거인단을 누가 차지했냐는 결과만 중앙에 보고가 되고 선거 결과를 빠르게 알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방식은 적은 유권자 수의 주에서 선호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의 목소리가 전체의 유권자 수에 비해 작기 때문에 선거의 양상이 간소한 차이로 나올 경우는 적은 유권자의 주 선거인단의 수가 결정적인 캐스팅 보트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60년 미국 대선과 최근(2000,2016년) 선거 결과 비교

이러한 방식의 선거가 한국에서도 처음 주목을 받은 것은 2000년 앨 고어와 부시, 그리고 2016년 트럼프와 힐러리의 선거에서 실제의 유권자 수에서는 민주당의 고어와 힐러리가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인단 투표에서 져서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다르게 나오면서 였다.

앞에서 이야기한 19세기 중반 미국 남부에서의 노예제도에 따른 갈등은 정치인들에게도 옮겨졌다. 1854년 5월 캔사스-네브라스카 법안이 발효되면서 같은 해 7월 6일 이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공화당(Republican Party)을 창당한다. 창당 2년 후 1856년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은 존 프레몽(John C. Fremont)후보를 내지만 민주당 부캐넌(James Buchanan)이 대통령이 되면서 패배하고, 이어서 1860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링컨이 나오게 된다.

각 지역별로 인구 밀도가 다른 이유로 위의 지도상의 결과만으로는 선거의 상황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아, 실제의 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링컨은 공화당의 유일한 후보로 나와 당시 분열된 민주당에서 2명의 후보가 나오고 다른 당의 다른 후보까지 분열된 상태여서 비교적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 그러나 위의 지도 상의 분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미국 동북부와 태평양 인접한 2개의 주에서만 선거인단의 승리로 이긴 것이다. 또한 전체 유권자의 40% 정도이지만 전체 선거인단 303명 중 180명을 차지하여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남부에서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한 대통령이 나오면서 남부를 중심으로 한 분리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선거인단 투표 방식의 결과가 흥미로운 점은 2016년 마지막 대선에서 힐러리가 전체 유권자 수에서는 거의 2백 8만명 이상 압도하는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인단 투표(Electoral Vote)에서는 오히려 트럼프가 57% 의 과반수 이상으로 승리를 했다는 점이다. 이는 2000년 부시와 고어의 대선에서도 실제의 유권자 수를 더 많이 받은 고어보다 부시가 단지 4명의 선거인단의 차이로 이긴 것을 고려하면, 대선을 기획하는 입장에서는 전략적인 차원에서 작은 유권자 수의 주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유의할 수 있다. 처음 미국의 헌법을 만들때 이러한 선거 제도를 결정한 초창기 정치인들이 이러한 면 - 낙후되거나 유권자가 적은 지역 이라도 무시할 수 없도록 고려되는 점 - 을 알고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거대한 대륙 안에서 적은 인구를 가진 주라 하더라도 그들의 선거인단 수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 대선 결과 비교 (1860, 2000, 2016년)

이러한 선거인단 방식의 미국대통령 선거를 이해하였을 때 이번 2020년 (트럼프와 존 바이던)의 대선은 전체 538명의 선거인단 중 그 절반인 269 명 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선거인단을 차지하는 후보가 승리를 하는 게임으로 요약이 된다. 만약 트럼프 입장에서 선거를 바라보면 아무리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 지역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민주당 성향의 유권자가 많은 곳이라 이길 확률이 거의 없다면 이 지역에서 나오는 55명의 선거인은 포기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대신 텍사스나 플로리다와 같은 공화당 성향이 강한 지역을 반드시 승리하고, 선거 양상이 치열하게 근소한 차이로 갈 수록 3명의 표를 가진 와이오밍(Wyoming) 같은 지역에서 승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계속...)

[] BBC 미국 선거 이해

https://www.bbc.com/news/world-us-canada-53558176

[] 1860년 미국 선거 결과 (위키)

https://en.wikipedia.org/wiki/1860_United_States_presidential_election

[] 2016년 미국 선거 결과 (위키)

https://en.wikipedia.org/wiki/2016_United_States_presidential_election

[] 2000년 미국 선거 결과 (위키)

https://en.wikipedia.org/wiki/2000_United_States_presidential_e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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